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행15:39-41)
사도행전에서 주의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15장에 가슴 아픈 사건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하고 1차 선교 여행을 함께 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둘도 없는 단짝이고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하지만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그를 데려가지 말자고 다투다가 결국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성령 충만하고 복음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자들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은 정말 은혜가 안됩니다. 선교사들이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현지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사역하면서 얻는 마음의 상처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난 저 사람이 가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 라고 할 정도로 미움과 상처가 큽니다. 또한 그런 감정과 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더 괴로운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사건 전까지는 좋은 관계에서 함께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누가 더 잘못했는가 비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결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남도 중요하지만 서로 헤어질 때도 잘 해야 합니다. 깊은 마음의 앙금을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후에 세월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나도 툭툭 털어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넓은 그릇을 품고 살 일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주님의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훌륭한 사람도 다 약한 부분이 있고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모습을 자기가 잘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세우고 연합으로 사역을 할 때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일치와 연합이 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같이 가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둘이 괴로운 것보다 혼자 외로운게 낫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다름과 갈등이 생기면 양보와 화합없이 대립하고 분열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양보를 통한 화합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성경적인 길이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는 서로의 인격에 상처를 주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축복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차선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결별 후에 두개의 전도팀이 되어 각자의 사역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남이 하는 일에 자신의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판단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서 좋은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면 그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삶입니다. 나와 달라도 상대방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축복할 수 있는 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