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12:6,7)
욕망에 끌려 죄를 즐기는 그 순간은 달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 쾌락이 끝나고 나면 깊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 고통은 때로는 뼈를 삭힐 정도로 길고도 깊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찾아온 시기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약 1년이 경과한 때였습니다. 다윗은 범죄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1년을 보낸 것입니다. 만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지냈다면 다윗은 망했을 것입니다. 죄 가운데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보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마비된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양과 소가 많은 부자가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는 이야기를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비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더 엄청난 죄를 범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죽어 마땅한 자로 규정하는 모습이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자기 마음의 죄악을 발견하고 인정하기는 싫어하면서도 남들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펴보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7:3). 늘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중 잣대 버릇은 참 고치기 힘든 우리 내면의 고질적인 부패성입니다.
다윗을 한방에 무너지게 했던 것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는 나단의 말이었습니다. 부드럽게 돌려 말하면 못알아듣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합리화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방어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지를 둘 수 없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이 전한 도전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아 깊은 회개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나에게 먼저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각자를 지켜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