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27:1-2).
다윗이 그를 따르는 무리 육백여 명을 이끌고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의 판단은 차라리 블레셋으로 피해 지내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 것입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불안하게 쫒겨다니는 삶을 언제까지 계속 할 수는 없습니다. 거느린 식구들도 있고 부하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조국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은 또다른 위험이 늘 시작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다윗은 가드의 아기스왕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습니다. 블레셋을 쳐부수고 멸망시켜야할 다윗이 아기스의 종으로 행세하고 있는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망명 생활은 이중 충성이며 자기 모순적입니다. 그의 신하가 된 이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데에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결국 거짓말까지 해야 했습니다. 죄가 죄를 부릅니다. 첫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계속 잘못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적인 삶에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야할 성도가 오히려 세상에서 사단의 종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지 않으면 세상과 손을 잡게 됩니다. 우리는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나의 삶에서 판단은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연약함을 보이는 것을 늘 선택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선택을 한번의 고민도 없이 한다면 내가 과연 믿는 사람인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중 충성은 결국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할 것입니다. 매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따를수 있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