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 (3:14)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가 죽고 그의 동생인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의 아들의 이름도 여호람인데 실은 그들이 동맹을 맺고 우정을 과시하가 위해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동명이인인 셈입니다. 왕이 된 여호람은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처럼 악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2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이 연합한 모압 원정 길에 물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놓이자 엘리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람은 평상시에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탄식하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자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여호람을 돕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이적을 베풀어 물을 제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람만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여호람은 여호사밧 덕분에 살았듯이 소수의 참된 성도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겁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친다(잠11:10)’고 했습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복을 받기고 하지만 나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냥 지금 있으니까 있는 거지’라는 단순한 대답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없지 않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언가요? 없음의 가능성이 있는데 나는 없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의 죽음으로 이 땅을 떠나 이곳에 없는데 ‘나는 왜 지금 이곳에서 없지 않고 살고 있는가?’입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에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명(生命)은 살 생(生)자와 명령, 또는 목숨 명(命)자를 씁니다. 그래서 생명은 “살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형통한 삶으로 주변이 복을 받도록 살아가라는 거룩한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