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6:6,7)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언약궤는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이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 언약궤를 운반하여 다윗성에 안치하려 합니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민족이 더욱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한 번의 뼈아픈 실패를 경험합니다. 아비나답의 자손인 웃사가 운반 도중에 언약궤를 손으로 붙들었다가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호사다마와 같다고 할까요? 좋은 시기에 선한 열심으로 이루려 한 일들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믿음이 없거나 형식적인 태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였기에 언약궤를 운반하고자 한 것입니다. 언약궤 운반에 새 수레를 사용한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열심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가 명백히 잘못을 범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당시 물건을 옮길 때의 보편적인 방법대로 수레를 사용하여 언약궤를 운반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소가 뛰므로 궤를 붙들었던 웃사가 죽게 됩니다. 손을 뻗어 궤를 잡은 웃사의 행동 속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무시하고 인간적 능력을 앞세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가리우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신앙적 범주나 교회 안에서만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찾아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심(계시)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신을 섬기는 방법까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도 내 스타일이나 내 방식대로 내 기분에 따라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 뜻을 더욱 알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으며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의 동기와 목적이 선한가? 그리고 그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이것을 늘 돌아보는 모습이 필요합니다.